아몬드-송원평

 책에서 만큼은 남들이 다 읽을 때 읽는 게 싫다. 유행을 따르기 싫다고 해야 하나... 한강의 소설을 꾹꾹 담아놓고만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아몬드는 내가 꾹꾹 쟁여놓고만 있던, 책장에서 늘 모르는 척 흐린 눈을 하던 그런 소설이다.

 

책은 편도체 이상으로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의 이야기이다. 길거리에서 맞고있는 아이를 보더라도 그 상황이 당황스럽거나 걱정스럽다기보다는, 그냥 아... 이런 일이 있구나 하는 정보 습득의 느낌이랄까... 그래서 맞은 아이가 길거리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다고 해도 그냥 동네 슈퍼에 가 사실을 알릴 뿐이다.

그런 윤재에게는 엄마와 할머니, 2명의 가족이 있다. 할머니는 어린시절 자신의 바람과 달리 대학생 때 미혼모가 된 딸아이와 그 아들을 품어주는 츤데레 노인이다. 윤재가 조금 다르더라도 그냥 손자다.. 하고 받아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을 주는 그런 사람. 엄마 역시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을 주지만 아이가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할까 걱정스럽다. 아이가 평범한 어른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들은 뇌 발달에 좋다는 아몬드를 아이에게 꾸준히 먹이고 감정을 머리로 가르친다.

그런 가족이 윤재의 눈 앞에서 묻지 마 칼부림에 쓰러진다. 그 순간에도 어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소설 안 윤재의 시점에서 보면 칼부림에 당하는 엄마와 할머니의 모습은 어떤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배경과 떨어지는 눈이 더욱 그렇게 느끼게 한다.

갑자기 혼자가 된 윤재에게 어쩌면 소설처럼 사람이 모인다. 엄마의 헌책방 윗층에서 빵가게를 하시는 사장님, 사장님에게서 소개받은 부자 아저씨, 그 아저씨에게서 부탁받아 아들노릇을 하며 인사하게 된 아저씨의 부인, 그리고 그 부부의 오래전 잃어버린 아들 곤이. 불같은 성격의 곤이는 자기 대신 죽어가는 엄마와 인사한 윤재가 미울 수 있지만 그 아이의 무덤덤함에 어쩌면 편안함을 느끼며 곁에 맴돈다. 윤재는 이런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동안 못 느꼈던 감정을 알게 된다...

 

그렇다. 감정을 알게 된다. 엄마가 윤재에게 했던 교육들처럼. 어느 날 갑자기 수많은 감정을 느끼는 소설적인 장치는 없다. 그냥 정말 알게 된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감동이랄까... 아이가 세상에 맞춰 변하지 않더라도 그 안에서 나름의 무언가를 찾게 되고 그로 인해 그의 인생이 풍부해지는 느낌이다. 일반인들의 눈에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은 무미건조한 로봇 같은 사람이겠거니 하지만, 그들 나름의 세계가 있음을, 그리고 그게 나쁘지 않은 느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 속의 세계는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더 이상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영상 속의 이야기는 오로지 찍혀 있는 대로, 그려져 있는 그대로만 존재한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의미는 몰라도 상관없다. 아무 페이지나 펼치면 일단 반쯤 성공이다."

 

"사람들은 계절의 여왕이 5월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어려운 건 겨울이 봄으로 바뀌는 거다. 언 땅이 녹고 움이 트고 죽어 있는 가지마다 총천연색 꽃이 피어나는 것. 힘겨운 건 그거다. 여름은 그저 봄의 동력을 받아 앞으로 몇 걸음 옮기기만 하면 온다."

 

"도라는 뭐가 우스운지 까르르 웃었다. 수백 개의 작은 얼음 조각이 바닥에 흩어지는 것 같은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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